



Paring with Shadow
그림자와 짝을 이루는
갤러리 도스 2022
작가의 글
하나만 남겨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고민들을 납작하게 만들어 보려는 심산으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휴식, 사람, 색감, 붓의 스트로크 같은 단어들이 걸러지지만 가장 나중까지 남는 것은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나에게 하나의 독립된 형태로 인지된다. 그림자라는 쉐입은 본체의 형태에서 변주된 형태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둘을 하나의 형태로 이어 주기도 하며 시간대에 따라 짧아지다가 길게 늘어지기도 하면서 나름의 리듬을 만든다. 손끝과 발끝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형태는 그림자 속에 따뜻한 햇살을 담기도, 서늘하고 차분한 그늘을 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림자의 실루엣은 양각을 따라 곡선의 지형을 읽어주는 안내자 같은 역할을 해준다.
그림자는 그늘을 만들어 낸다. 그림자가 물리적인 단어라면 그늘은 심리적으로 연결된다. 그늘에는 쉼이 있고 그늘은 모든 것을 덮어준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의 치부를 숨겨줄 공간이자 안으로 침잠할 수 있는 아지트이다. 이전 작업에서 나는 휴식이라는 주제를 탐색해왔다. 휴식은 자신의 내면과 조우하며 자신을 응시하는 시간이라 보았고 그러한 관점에서 그림자는 빛과 어둠의 매개체로서 자신의 우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창문이라고 생각한다. 때론 내면의 어둠과 마주하는 일은 불편할 것이다. 우리는 반짝이는 순간만을 기록하고, 슬픔이나 괴로움은 불온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빛의 반대편에 놓인 감정들과 화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번 작업에서 그림자는 때로는 반사된 투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를 되돌려주는 빛, 거울 같은 그림자, 그림자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림자는 곧 나의 일부이자 나를 비추는 반사체인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늘 출발선에 서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육아와 작업을 이어간다는 건 몇 발자국을 가도 그 자리가 다시 출발선임을 매번 자각하게 했다. 내가 오늘 무엇을 보았는지가 무엇을 그릴지와 연결되어 있기에 그림의 주제는 번번히 휘발되었다. 그럴 때마다 자화상을 그리듯 아이들을 그렸고 그렇게 그림과 삶이 다시 연결 지점을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을 그리는 동안 꾸밈없는 나를 마주하며 발자국을 남기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내가 직접 찍은 대상을 그려왔다.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에는 모델을 구하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내가 사진기를 들이밀어도 관심 없다는 태도였고 심지어 모델을 자처해 주었다. 그곳이 뉴욕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진 찍는 일은 굉장히 조심스럽다. 불순하게 사용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탓에 알아차리는 순간 기피한다. 애로사항을 느끼던 중 소셜네트워크에서 몇몇 사진과 인물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끈 요소는 모델이 만드는 그림자의 모양들이었다. 그들에게 용기 내어 허락을 구하고 캔버스에 옮기게 되었음을 미리 밝힌다. 그들을 통해 SNS에서 보여지는 면면들과 또 드러나지 않았을 면면들을 반추해보고 그림자라는 매개를 통해 현대인을 바라보는 작은 틈을 만들어 보고 싶다.
“미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만들어 내는 그늘의 무늬, 명암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늘에 대하여」, 다니자키 준이치로
내가 그리는 대상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통하여 더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변모할 것이라 기대해본다.




Arena_muted
음소거된 공간
우석 갤러리 2017
작가의 글
쉼은 무엇일까. 단순히 몸을 쓰지 않는것일까? 몸을 쓰면서도 쉼은 가능하다. 주말이면 싸이클을 타고 도시의 외곽을 라이딩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만의 쉼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쉼의 본질은 생존하기 위해 몸을 쓰지 않는 데 있다. 생존을 위해 썼던 사회적 페이소스를 벗어 던지고 자연 앞에서의 내가 되는 것이다. 자연 앞에서 그 어떤 사회적 가면이 필요한가. 우리는 그냥 우리 자신이 되면 족하다. 나약한 나를 드러낼 수 있음이 쉼의 본질이리라. 우리가 공짜로 얻은 것(몸, 시간, 공간, 날씨 등)을 누리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냥하지 않고 햇빛을 쬐러 나온 사자와 같은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을 성찰한다. 사자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스스로를 진단하고 치유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쉼이란, 우리가 우리를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왜 쉼을 그리는가. 처음 시작은 풀(grass)의 초록(green) 이었다. 초록을 캔버스에 칠하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낀 적이 있다. 나의 관념 속에서 초록은 그다지 멋진 색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연 앞에서 그토록 다양한 초록의 덩어리와 질감이 있다는 것을 경험한 후 초록은 나에게 종교 같은 것이 되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 앞에서 위로를 받는 데에는 싱그러운 초록의 힘도 크리라 생각한다. 그 이후로 초록이 많이 보이는 곳, 공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사방이 초록으로 둘러 쌓인 숲이 아니라 왜 도시 안에서의 국부적인 초록인가. 그것은 아마도 내가 자연을 갈망하는 크기만큼 도시를 염원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절대적 자연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시라는 프레임에서 나 자신에게로 감각의 추심이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자연을 이야기 한 것이다.
도시라는 프레임으로 다시 줌 아웃 한 후 두 번째 찾은 공간이 바로 이번 경기장 시리즈이다. 다만 경기장 안에 기존의 구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하는 선수, 관람하는 관객, 중계하는 미디어, 기업의 광고를 모두 걷어낸 후 커다란 한 공간- 매우 소란하고 분주할 공간- 의 음소거된 공간, 빈 공간의 울림을 찾아 보고자 했다. 텅 빈 경기장은 낯설다. 잘 알고 있는 공간이지만 그 곳에 혼자 남아 본 경험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도시에서 혼자만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그러나 경기장만이 지닌 팽창된 열기와 소란에 감정 이입하는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험. 기존의 맥락에서 그것을 축출했을 때 생기는 그 소강상태에 자신을 놓았을 때만이 닿을 수 있는 지점 - 관망하는 태도, 관조적 상태- 로 유인해보고자 함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인간이 만든 자원과 네트워크 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역시 순간 순간 만나게 된다. 경기장의 구도는 삶에 비하면 너무나 단순 명료하고 유희적이고 정의롭다. 경기장을 삶에 비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나의 가장 분주하고 소란스럽게 과열되어 부풀어 오른 자아와 동떨어져서 바라보는 자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면 나는 더 열심히 네트워크를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Embodiment
임바디먼트
갤러리 피쉬 2004
작가의 글
임바디(Embody) –
도시와 자연은 함께 공존하고 함께 번영할 수 없는 단어인가?
도시에서 자연의 원형은 테두리를 쳐놓고 인공적으로 심어놓은 공원이나, 날씨 좋은 날 올려본 하늘에서나 볼 수 있는, 한정적이고 일부로써만 존재한다. 이기와 편의의 혜택이 자연의 혜택보다 우선하는 도시의 논리를 혐오하고 탈피를 갈망하다가도, 어느 날, 본인은 자동차의 미끈한 유선과 가속력을 보고 감탄하거나, 어두운 밤 도시의 풍경이 가로등의 질서 정연한 불빛으로 찬란한 것을 보고 감탄한다. 시골 주민이 탁 트인 대지의 하늘에 물든 붉은 태양빛을 보고 감탄하듯이 말이다. 본인의 작업은 도시를 예찬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도시에서만 오직 존재하는 도시의 미학을, 자연의 미학과 동등한 따뜻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그럼으로써, 도시의 기괴함을 누그러트리고 싶은 바람이 있다. 다시 말하면 노을 빛과 도시의 인공조명이 똑 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두 가지의 다름이, 어떻게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연과 도시의 이분법이 아닌, 도시에 관한 선입견 혹은 자연에 관한 선입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대학시절부터 나는 휴식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왔다. 캠퍼스의 풀밭에서, 휴게소의 의자 위에서, 도서관 앞 계단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두 발을 쭉 피고 있다든지, 한 쪽 다리를 올렸 다든지, 턱을 괴었거나 팔베개를 하고 잇다는지, 사람들이 쉬고 있는 모양은 다양하고도 자유분방했다. 최대한 자신의 몸을 중력에 맞기고, 풀밭의 지형이나, 의자의 곡선에 맞게 자신의 몸을 풀어놓은 모습을 다음을 준비하는 쉼표의 모습이기에 내면에 더 많은 자유와 창조를 품은, 지적이고 동물 다운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는 것으로도 함께 쉬고 있다는 안위를 얻곤 했다.
느림을 통해 인간이 유연하게 자신의 내부를 바깥 환경의 디테일 하나하나에 노출시키는 이완의 순간들, 나는 이 순간을 주로 공원에서 찾았다. 그곳에서, 쉬어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나무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 내 머릿결이 흔들리는 것도 느끼고, 정지한 듯 보였던 구름이 일순 흘러가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하며, 미세한 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내 내면의 창이 하나씩 외부를 향해 열릴 때 나는 유연하고 투명해질 수 있었다. 동시에, 도시가 재촉하는 ‘빨리 빨리’의 시간 중독성이나, 도시의 생존 논리가 낳는 스트레스가 여유로움을 통해 무장 해제됨을 느꼈다. 이와 같이 공원은 도시와 고립되는 동시에 도시의 빠른 자극이 소멸되는 지점이며, 공원에서 비로소 도시의 블라제(blasé: 어느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상태)가 해소된다. 따라서 공원은 특별한 공간이다.
게다가 나는 공원이 가진 수많은 초록색들과 그 초록색이 햇빛에 반사하여 반짝이는 것을 볼 때면 그 색들을 하나씩 캔버스에 짙게 바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공원의 자연성은 나에게 본능이자 종교 같은 것이다.
체코의 속담 중 느림에 대한 비유로 ‘신의 창문을 응시하다. 신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은 절대 지루하지 않으며 행복하다’는 비유가 있다. 이렇듯 느림은 육체적 게으름에서 연유된 결핍된 단어가 아니라, 시간을 더욱 풀(full)로 가동하는 이완적 상태를 말한다. 느림은 미세함과 기다림이 베여 있는 충만하고도 정신적인 행태이다. 나는 이러한 느림을 도시의 고립의 해결점으로 투구한다.
사각 프레임 안에 멈춰진 그들의 시간이 전시 공간에서 다시 흐르는 동안, 관람자가 그것을 경험하는 전시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성공적이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관람자는 작업의 자극 수치에 맞게 천천히 자극 신경계를 조율하고 이가 100%의 흡수 상태에 이를 때 관람자는 작업 속 인물과도 같은 게으른 평화를 경험할 것이다.
몸이라는 매개를 통해 감성과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는 (embody) 연구들이 활발해지고 있다. 감성과 문화를 추구하는 목표 그 기저에는 여유로움과 한가로움을 통해 풍요로워지고 싶은 욕망이 있지는 않은지…
내가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위를 얻었듯이, 나의 작업을 통해 관람자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Embody –
Cannot civilization and nature co-exist and co-prosper?
The archetype of nature in a city exists only in portion and limited, for instance, artificially planned grass within boundaries or the sky on serene day. Although I do not like how civilization has forsaken a meditative calm for a frenetic view of progress, some days, I admire the glamorous curve of a car and the acceleration of it or the street lights illuminating in order. It is like rural person admiring the afterglow of sunset on the fields. I see the esthetic of urban image as equivalent to the image of nature. Thereby, I have the desire to soften the unbalance of the city. In other words, the dazzling of sunset does not hold the same beauty of street lights, rather their differences are the study of how they can find a point in which they can share each to other’s differences. This is not the dichotomy between nature and urbanity, but rather gives meaning to the fact that it provides a new view to the preconception of urbanity and nature.
Since college, I have become interested in people who are resting. For example, people resting on the grass on a campus or couch in a lounge or on a long flight of steps in front of a library. Some of them are laying down stretching themselves out or pulling in one foot or cupping their chins in their hands or resting their heads on their arms, using it as pillow. The shapes of people at rest vary greatly and are liberal. The shapes rely on the gravity, and people’s bodies are released to fit the curved surface of the grass or couch. This is the pausing before the next action and instills within the interior-self more freedom and creation, and holds the appearance of intelligence and animal qualities. I used to become comfortable even by the observation of resting.
I searched in parks for the moments of relaxation when a human being exposes its inner-self to the details of exterior environment. As I observe people who are resting, I feel my hair brush against the wind as a tree waves its branches, I recognize that clouds which once seemed stagnant are eventually moving, and I open my ears to miniscule sounds surrounding. I realized that it is only when the sindows to my inner-self open one by one that I become flexible and transparent. Then I take antidotes of my addiction to a speedy lifestyle and open the window to my inner soul and try to tune into every single detail of outer signs that knock me out. A park is a space that is isolated within a city and at the same time sweeps away the addiction of a speedy city lifestyle. Hence a park is a special space in the city where the blasé is dissolved. Besides, I feel the sudden impulse to paint green, heavily on a canvas when I see the green color in a park. Hence, the nature quality in a park is an instinct and a religion to me.
There is a Czech proverb that describes the slowness with a metaphor: “They are gazing at God’s windows. A person gazing at God’s windows is never bored; he is happy.” Indeed, slowness is rather a maximum operation or full-activation of time than a surplus of time. Also, slowness is distinguished by indolence. Indolence implies non-motivated and frustrated lack of activities. However slowness connotes the repletion of activities and a subtle, ethereal mental state. I declare slowness as a solution to the alienation of a city.
People resting in the park seem to maintain the same shape and gesture for a while. In reference to their posing, their existence in my paintings seem not to be paused or fixed in movement., because silence, lying down, and inactivity are the usual way of expressing their existence as bored and resting people. They exist in my painting in the same way as they exist in reality. Their posing exists in the time flow of my painting.
Therefore, the viewers have the illusionary feeling that time still flows in my painting. As folks in the park slowly merge into the surrounding environments. The viewers of my work slowly accept the time flow of my painting and come to “experience,” not just peek at my painting. If this takes place successively, the viewer tune into the level of stimulus, which is parallel to people’s situation in the park and experience the same comfort I have.
Seeing these paintings radiate stimulation little by little in the moment you enter a dark room. The iris of your eyes becomes wider open. And you finally get the right tuning of the light you feel. It is like when you see the clouds in the sky. You rarely recognize they are moving at first sight but you eventually see them moving. And you will never think it is slow.